틀:서울의 역사 위례성(慰禮城)은 백제 초기의 수도이다.[1] 《삼국사기》는 온조가 처음 백제를 세울때 수도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2] 4세기 중반 이후 한성(漢城)이라 불렸다.[1]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백제 전쟁의 절정인 474년 위례성 함락을 "한성" 함락으로 표현한다.[3]
명칭
백제어는 단편적인 지명, 관직명, 인물 이름 등만이 한자로 음차되어 전해지고 있어 어원이나 유래를 알기 힘들다.[4] "위례"라는 이름 역시 어떤 뜻인지 알기 어렵다.[1] 18세기 실학자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의 〈위례고〉에서 위례의 의미를 사방을 막는 울타리를 뜻하는 "우리"라고 보았으나 특별히 언어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5] 4세기 이후 한성이라 불린 것은 한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강이 대수, 아리수, 한수(寒水)로 불리다 한수(漢水)로 불린 것은 중국 문화의 확산 이후의 일이다.[6]
위치
《삼국사기》 온조왕조에는 애초에 하북에 위례성을 세웠으나 동쪽으로는 낙랑이, 북쪽으로는 말갈이 위협하여 방어가 힘드니 하남으로 옮긴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낙랑은 당시 낙랑군과 연계하고 있던 오늘날 춘천지역의 예맥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된다.[7] 이에 따라 위례성은 건국 직후의 하북 위례성과 이후의 하남 위례성으로 나뉜다.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위례성의 위치는 강을 끼고 있는 한반도 중부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다른 지역과의 거리와 같은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부족하여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중기까지 위례성의 위치는 천안시 위례산성으로 비정하여 왔으나[1] 정약용은 《백제론》, 《아방강역고》 등을 통하여 한성부 동북쪽에 있었다고 비정하였다.[8] 1928년 을축대홍수로 풍납토성에서 대량의 백제 유물이 발견되자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가 되었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여겼다.[9] 또한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준비하며 체육시설과 공원으로 개발된 몽촌토성도 1983년에서 1989년 사이 여섯 차례의 발굴을 통해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던 터와 각종 유물이 발견되면서 백제의 왕성으로 인정되게 되었다.[10]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이웃하고 있어서 한성백제 시기 위례성이 남성과 북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기록과 부합한다.[11] 이에 따라 국립박물관을 비롯한 고고학계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있다.[12]틀:참고 쪽
충청남도의 향토사학자들을 비롯한 충청권 일부에서는 여전히 천안 위례성설을 주장하고 있다. 2010년 천안 성거산 위례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백제 때 성곽이라는 점은 밝혀졌으나 그곳이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13]
한편 온조가 처음 세웠던 하북 위례성은 중랑천일대로 추정된다.[14]
역사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위례성의 북성과 남성으로 비정하고 이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삼국사기》는 온조왕때에 이미 하북위례성을 포기하고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그 보다 이후의 시대인 근초고왕의 왕권 강화와 더불어 북성과 남성을 아우르는 왕도(王都)로 건설되었다고 보고 있다.[15] 몽촌과 풍납의 두 토성은 판으로 틀을 만들어 그 안에 흙이나 모래 등을 층층이 부어 단단히 다진 뒤 이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으로 만들어졌다.[16]
풍납토성은 토성 축조 이전부터 커다란 마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발견되었고 늦어도 3세기 무렵에는 토성이 축조되었다. 한편 몽촌토성의 축조는 이보다 늦은 4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갈등 고조에 따른 방어 시설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12]틀:참고 쪽 몽촌토성에서는 목책 흔적과 뼈갑옷, 투겁창, 철검 등 무기가 발견되어 풍납토성에 비해 보다 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지만[17] 백제의 발전 과정에서 두 성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보다 복합적인 왕도로 변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한성백제가 약 5백년간 지속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몽촌토성의 추가는 군사 목적 이외에도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정치, 경제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왕도의 기능 역시 복잡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몽촌토성 건설 이후 오늘날의 암사동, 천호동 등지에도 성곽을 건설하였다.[12]틀:참고 쪽
한강은 위례성과 연결되는 중요 교통로였을 것이다. 백제는 위례성을 중심으로 주변을 복속시키며 성장하였고 오늘날의 황해도까지 진출하여 오호십육국시대를 맞아 구심력을 잃은 낙랑군, 대방군과 대결하게 된다.[19] 한사군이 멸망한 뒤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고구려-백제 전쟁이 일어났다. 백제는 한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며 선전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으로 패배를 겪었고, 475년 장수왕이 직접 남진하여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게 된다. 이로서 백제는 위례성을 잃고 오늘날 공주시인 웅진성으로 천도하여 웅진백제가 시작되었다.[20]
같이 보기
- ↑ 1.0 1.1 1.2 1.3 위례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 ↑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왕을 죽이다 ( 474년 07월 ),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 ↑ 백제어, 신편한국사
- ↑ 이병선, 「위례성」과 「백제」·「십제」국명고, 한국어문학회, 1978년
- ↑ 한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다 ( 기원전 6년 05월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 ↑ 조성을, 정약용의 역사 이론의 전개와 그 성격, 국사관논총, 제93집, 2000년
- ↑ 풍납토성 - 백제의 첫 도읍, 하남 위례성, 한국사연대기
- ↑ 몽촌토성 - 한성백제시대 또 하나의 왕성, 한국사연대기
- ↑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 475년 09월 ), 삼국사기, 권 25 백제본기3
- ↑ 12.0 12.1 12.2 《한성 475 - 두 왕의 승부수》, 국립공주박물관, 틀:Isbn, 2026년
- ↑ “백제 때 산성은 맞지만 … ” 2000년 전 온조의 흔적은 못 찾아, 중앙일보, 2010년 4월 9일
- ↑ 김윤우,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 고, 단국사학회, 1993년
- ↑ 왕도조직, 신편한국사
- ↑ 신희권, 판축토성(版築土城) 축조기법(築造技法)의 이해(理解) - 풍납토성(風納土城) 축조기술(築造技術)을 중심(中心)으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2014년
- ↑ 몽촌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차원, 백제 한성기 몽촌토성의 성격과 기능, 백제학보, 2025년
- ↑ 백제국의 성장, 신편한국사, 우리역사넷
- ↑ 웅진천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